어떤 책은 시끄럽지 않다. 요란한 주장도, 과장된 위로도 없이 조용히 곁을 지킨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마음을 더 깊이 울린다. 이석원 작가의 신작 산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설명하기 어렵고 드러내기 힘든 마음의 결들을 차분히 포착한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왠지 읽는 내내 울컥하게 만들고,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을 끄집어내게 하는 힘이 있다.
1.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간다”
이 책의 제목이자, 중심을 이루는 정서는 ‘희미한 빛’이다. 어쩌면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강렬한 확신이나 찬란한 성공보다, 희미하지만 잃지 않은 무언가에 기대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 빛을 ‘사랑’, ‘기억’, ‘그리움’, ‘미안함’, ‘기다림’ 같은 이름으로 불러낸다.
특히 인상 깊은 점은, 작가가 어둠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쉽게 말하는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그저 지금의 어둠을 함께 바라봐주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이석원 작가 특유의 낮은 목소리, 속삭이듯 건네는 문장은 때로 위로가 되고, 때로 반성의 거울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는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충분히 괜찮은 사람인지, 나는 누군가의 작은 빛이었는지.
2. ‘소설이 아닌 산문’의 힘
이석원 작가는 이전에도 산문집 『보통의 존재』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 책에서도 그는 일상의 단상, 사적인 기억, 한없이 조용한 순간들을 글로 정제하여 우리 앞에 내놓는다.
산문이라는 장르의 특징은 ‘솔직함’이다. 소설처럼 인물과 플롯을 빌리지 않고, 작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독자는 저자의 진짜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를 유지한다. 어떤 구절은 마치 시처럼 짧고 강렬하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슬픔은 때로 너무 길어서, 끝이 뚜렷하지 않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독자는 자신이 떠나보낸 누군가를 떠올리고, 헤어져야 했던 순간을 되새긴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독자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3. 관계에 대한 섬세한 통찰
이석원 작가의 산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는 ‘관계’다. 부모와의 관계, 연인과의 관계, 친구와의 거리,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거리까지. 그는 이 모든 관계를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현실적인 거리와 감정으로 다룬다.
특히 ‘사랑’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무척 담담하면서도 깊다. 사랑이 언제 시작되는지보다, 왜 서서히 멀어지는지를 설명하는 문장들은 연애를 지나온 이들에게 묵직하게 다가온다. 사랑은 꼭 커다란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하루하루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로 무너진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아프지만, 동시에 성장이다.
이 책은 그런 인간 관계의 부침과 고요한 종말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작가의 글에서 자신의 실수, 후회, 아쉬움을 꺼내어 치유받는다.
4. 빠르게 사라지는 시대 속에서, 천천히 머무는 책
요즘은 빠르게 읽히는 콘텐츠가 사랑받는다. 짧고 간결한 정보가 주류가 된 시대에, 이석원 작가의 산문은 그 흐름과는 정반대에 있다. 이 책은 하루에 한두 편씩, 천천히, 곱씹듯 읽는 책이다.
이처럼 느리게 읽히는 글은 오히려 오래 남는다. 독자는 문장을 읽으며 속도를 늦추고, 멈추고, 되돌아간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지금 자신의 삶의 속도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너무 조급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지금 내 안의 감정을 무시하고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직접 주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멈춰 서서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5. 무해하지만 선명한 문장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는 ‘무해함’이다. 요란한 교훈이나 고압적인 조언 없이, 그저 곁을 지켜주는 태도가 느껴진다. 작가는 자신이 느낀 감정과 사건에 대해 조심스럽게 회고하고, 그 안에서 작은 진심을 꺼내놓는다.
이 진심은 때로 모호하고 희미하지만, 그렇기에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어설프게 포장하지 않기에, 오히려 선명하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보이던 빛처럼, 이 책은 우리를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아주 작은 용기를 건넨다.
마무리하며 – 당신의 마음 한 귀퉁이를 어루만질 산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인생의 거창한 변화나 성취를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 겪었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감정들에 다가간다. 그래서 이 책은 독자의 마음에 잔잔히 머문다. 읽고 나면, 오래된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오르고, 잊고 있던 감정 하나가 다시 살아난다.
삶은 언제나 밝고 찬란하지 않다. 하지만 아주 희미한 빛만으로도 우리는 견딜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조용히 증명해낸다.
이 책은 그런 믿음을 주는 책이다. 지금 내가 조금 지쳐 있다면, 무언가에 마음이 시큰하다면, 그럴수록 이 책이 더 깊게 와닿을 것이다. 이석원 작가의 문장이 당신의 오늘에, 조용한 빛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