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인간의 선의를 전제로 한다. 일상 속 작은 기적과, 현실에 발붙이되 판타지를 품은 감성. 그런 그녀가 2022년 발표한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는, 제목부터 묻는다. "당신에게 유토피아는 어디인가요?" 이 질문은 단순히 가상의 이상향을 묻는 것이 아니다. 상처 입은 세계에서 우리가 꿈꾸는 삶, 그곳을 묻는 것이다. 이 책은 그 가능성을 열두 개의 이야기 속에 담아, 따뜻하고도 날카롭게, 조심스럽게 건넨다.
정세랑식 '유토피아', 상처와 함께 걷다
『너의 유토피아』는 팬데믹 이후의 삶, 기후위기, 여성혐오, 장애, 트라우마 등 지금 여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여러 결핍과 상처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은 절망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절망을 바라보되, 그 속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찾으려 한다.
예컨대 첫 번째 수록작 「오로라의 밤」에서는 한국 사회의 반복되는 여성혐오 범죄를 배경으로, 피해자 유가족이 겪는 고통을 다룬다. 하지만 정세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분노와 슬픔을 넘어, 서로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어둠 속에서도 연대라는 ‘빛’을 건져낸다. 이것이 바로 정세랑식 유토피아다. 현실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가능성의 끈을 놓지 않는 희망의 서사.
소설이라는 작은 실험실, 미래를 상상하다
이 책에서 정세랑은 ‘소설’이라는 공간을 실험실 삼아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펼쳐 놓는다. 「세이브 모드」는 기후위기가 더 이상 가상 시나리오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라는 전제하에, 에너지 부족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다. 저자는 탄소배출과 관련된 구체적 수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인간 본연의 감정과 윤리를 놓치지 않는다.
또한 「한 줌의 미래」는 로봇이 보편화된 시대의 이야기로, 기술 발전이 인간관계와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AI가 인간의 연인을 대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오늘날의 인간성과 사랑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정세랑은 말한다.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그녀의 유토피아는 멀고 비현실적인 이상향이 아니다. 작지만 실천 가능한,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변화의 징후다.
'나'와 '너'의 경계, 그리고 공존
이 소설집의 매력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다. 그들은 서로를 환대하고, 때론 이해하지 못해도 존중하려 한다. 특히 제목작 「너의 유토피아」는 국적도 문화도 다른 두 여성이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고, 다정하게 곁에 머무는 이야기다. 한 명은 전쟁의 상처를, 한 명은 성폭력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나는 네가 있는 이 세상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감상적이기보다는 조심스럽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함부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어주고, 존재를 확인해줄 뿐이다. 정세랑의 세계는 그렇게 ‘공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유토피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토피아는 이상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
정세랑은 말한다. 유토피아는 완벽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실천하는 ‘선의’에서 비롯된다고. 『너의 유토피아』 속 인물들은 거창한 영웅이 아니다.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외면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아프다고 말할 때, 함께 아파하고 손을 내밀 줄 안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유토피아의 조건이다.
열두 편의 이야기 모두가 하나의 메시지를 향한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지 않다. 너의 곁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유토피아는 사라지기도, 피어나기도 한다.
왜 지금, 『너의 유토피아』인가
팬데믹, 기후위기, 젠더갈등, 혐오와 차별…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다. 『너의 유토피아』는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준다. 위로하거나 도피하지 않는다. 대신 정확하게 바라보고, 가능한 세계를 상상하며, 그것을 언어로 구현한다.
정세랑은 독자에게 말한다. 당신도 이 세계의 가능성을 상상해보지 않겠냐고. 소설은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소설이 누군가의 삶에 단 하나의 장면이라도 남는다면, 그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마무리하며 – 유토피아를 상상할 용기
『너의 유토피아』는 정세랑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 세워놓은 다리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묻고, 대답하고, 또 다시 묻는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그리고 그 유토피아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이게 정답이다.” 대신 조용히 묻는다.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