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머네인의 『평원(The Plains)』은 처음 읽었을 때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라는 당황스러움을 안기는 책입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펼치기를 반복하는 동안, 독자는 어느 순간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 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머네인은 이 책에서 평원을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이 언어로 사유하고, 시선으로 해석하며, 고요 속에서 삶을 꿰뚫어 보는 행위가 얼마나 깊고 낯선 일인지를 독자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풍경이 아니라 시선에 관한 이야기
『평원』은 어느 한 젊은 영화감독이 "호주 평원의 중심부에 사는 신비로운 평원인들"을 다큐멘터리로 담기 위해 그 지역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책은 이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흔적도, 찍은 필름도, 촬영 후 편집본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는 촬영을 ‘계획’하고, 그저 관찰하며, 그 안에서 생각합니다. 이 자체가 머네인이 구축한 독특한 서사 구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았는가’**입니다. 머네인의 문장은 풍경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탐구합니다. 예를 들어, 평원의 안개 낀 경계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시각적인 디테일보다는 그 경계를 응시하며 떠오르는 사유가 주를 이룹니다.
“평원은 정적인 것 같지만, 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 마음속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실존주의 철학과 존재의 시학
『평원』은 얼핏 읽으면 지루하고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추상성 속에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존재의 질문’**들이 숨어 있습니다.
책 속의 평원은 인간의 본질, 공동체의 가치, 예술의 의미, 언어의 한계, 그리고 ‘기억’이라는 개념까지 건드립니다.
주인공인 영화감독은 평원의 지주들, 예술가들, 역사가들과 교류하며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 풍경을 진정 이해할 수 있을지, 또는 타인의 사유를 온전히 포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고를 유도합니다.
- 관찰하는 자는 과연 중립적일 수 있는가?
-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가?
- 예술은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생략'하는가?
이러한 철학적 질문은 독서를 지적인 행위 이상의 ‘명상적 경험’으로 끌어올립니다.
언어는 세계를 담을 수 있는가?
제럴드 머네인의 문체는 절제되어 있습니다. 과장된 감정 표현도, 드라마틱한 전개도 없습니다. 대신 그는 한 문장을 천천히 조율하며, 독자에게 여백을 줍니다. 언뜻 보면 정보가 결핍된 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정보를 초과한 침묵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사르트르, 카프카, 그리고 베케트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며,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문학적 도전을 안깁니다.
“당신은 문장의 구조가 아니라 그 ‘빈자리’를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머네인은 언어로 세계를 묘사하는 대신, 언어가 닿지 못하는 지점에서 독자 스스로 사유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평원』이 단순한 소설이 아닌, 존재와 인식의 실험실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한국인 독자에게 『평원』이 의미 있는 이유
한국 독자에게 『평원』은 결코 쉽지 않은 책입니다. 서사의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많은 설명을 생략하고, 구조를 해체하며, 텍스트의 목적 자체를 낯설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책이 가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너무 빠르고 목적 지향적이며, ‘결과’로 평가받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평원』은 독자에게 말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당신은 존재하고 있다.”
이 책은 속도가 아닌 깊이로, 사건이 아닌 침묵으로, 말이 아닌 ‘시선’으로 존재를 사유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보는지, 왜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마무리 하며 : '읽는 책'이 아니라 '머무는 책'
『평원』은 분명 모든 사람에게 권하기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는다면, 당신은 단순히 독서를 마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체류를 경험한 셈입니다.
조용히, 천천히, 반복해서 읽을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나는 『평원』.
삶을 관찰하는 당신만의 ‘시선’을 키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더없이 값진 동반자가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