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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 총성과 침묵 사이, 역사와 인간을 응시하다

by jaewon7010 님의 블로그 2025. 6. 27.

 

하얼빈


“나는 조국을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하여 죽으려고 싸웠다.”
— 안중근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의 서막이 열리기 전,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총성은 제국주의의 상징이자 조선을 압박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것이었으며,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조선의 청년 안중근이었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오늘, 작가 김훈은 이 역사적 장면을 중심에 두고 한 편의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바로 **『하얼빈』**이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다. '의거'라는 영웅적 서사의 이면에서 인간 안중근의 내면과 그 시대의 혼돈을 정제된 언어로 묘사한 철학적이고도 시적인 작품이다.


1. 안중근을 다시, 깊게 묻다

김훈의 『하얼빈』은 안중근의 생애 전체를 조명하지 않는다. 그는 하얼빈 의거를 준비하던 짧은 시간을 압축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안에 담긴 고민과 결심, 고통과 믿음은 독자의 가슴을 오래도록 울린다.

소설 속 안중근은 이상화된 영웅이 아니다. 그는 망국의 청년으로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고, 그 혼돈 속에서도 죽음의 이유를 묻는 철학적 고뇌를 안고 있었다.

“나는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야 하는가.”
“나는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

김훈은 안중근의 결심을 '자결'이 아닌 역사적 발언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살상의 행위가 아니라, **역사의 무대에 자신을 던지는 ‘선언’**이었다.


2. 침묵과 간결함의 미학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으로도 잘 알려진 김훈은 간결하면서도 직설적인 문체로 깊은 사유를 전하는 작가다. 『하얼빈』에서도 그의 문체는 여전히 날카롭고도 단단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절제된 언어와 침묵의 힘이 돋보인다.

불필요한 수사가 없다. 안중근의 행동 하나, 생각 하나를 묘사하면서도 역사의 맥락과 인간의 내면을 함께 관통하는 문장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는 혼자서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이런 문장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 개인이 겪는 고독과 결단을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3. 의거, 신념, 그리고 사라진 청춘들

『하얼빈』은 단지 안중근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등지를 오가며 의거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당대 청년들의 불안, 분노, 믿음, 그리고 사랑이 스며든다.

이토를 암살하기 위한 총탄은 단순히 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를 살아간 수많은 청춘들의 존재 선언이자 역사에 남긴 흔적이었다.

"우리는 죽음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안중근의 사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김훈은 냉정하게 묻는다.
“죽음 이후, 조선은 달라졌는가?”

그 질문에 독자는 각자의 해석으로 답을 찾아야 한다.


4. 공간, 날씨, 냄새까지 살아있는 묘사

김훈 특유의 묘사력은 『하얼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러시아의 겨울,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닷바람, 하얼빈역의 긴장감 넘치는 풍경을 마치 사진처럼 정밀하게 그려낸다.

특히 ‘하얼빈’이라는 지명은 단지 공간적 배경을 넘어, 한 민족의 상실과 갈망이 교차하는 상징으로 그려진다.

“하얼빈의 기온은 영하 30도를 넘기고 있었다. 눈은 바람에 지워졌고, 바람은 누군가의 숨을 빼앗듯이 날카로웠다.”

한 장면, 한 공간마다 감각적으로 다가오기에, 독자는 마치 그 시대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5. 지금, 왜 안중근을 다시 말하는가

김훈은 이 작품을 통해 과거를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철한 시선으로 역사의 맥락을 짚고, 현재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 지금 우리는 안중근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 그가 꿈꾸었던 ‘조국’은 실현되었는가?
  • 우리는 지금 어떤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얼빈』은 이런 물음을 던지며, 독자 스스로가 ‘역사적 인간’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것이 이 책이 단순한 역사소설을 넘어 철학적 소설, 현대적 질문으로 자리잡는 이유다.


 ‘하얼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얼빈』은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생애 중 극히 일부만을 조명하면서도, 그 이상의 울림과 여운을 준다. 총을 쏘는 순간보다, 그를 그 순간으로 몰고 간 사상의 흐름, 고독, 시대의 절망감을 차분히 따라가며, 독자는 어느새 그와 함께 총구 앞에 서게 된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김훈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는 단지 지나간 사건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구성하는 기억과 책임의 연속임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