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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례본을 찾아서 – 주수자 | 잃어버린 기록을 좇는 시간의 여정

by jaewon7010 님의 블로그 2025. 7. 8.

 

잃어버린 기록을 좇는 시간의 여정

 

 

"한글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그 뜻을 풀어놓은 ‘해례본’은 왜 자취를 감췄는가?"

주수자의 『해례본을 찾아서』는 단순한 역사 추적기가 아니다. 이 책은 언어의 뿌리를 좇는 여정이자, 민족 정체성과 문자 해석, 기록의 권리를 되묻는 문학적 탐험이다. 역사와 문학, 미스터리적 서사를 섬세하게 엮어낸 이 책은, 해례본이라는 실재하는 유산을 통해 ‘한글의 정신’을 다시 깨우는 이야기다.


해례본이란 무엇인가?

이 글을 본격적으로 리뷰 하에 앞서, 해례본이 무엇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해례본은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한 해설서로, 1446년 세종 28년에 간행된 훈민정음 정음본의 뒷부분이다.
이 해례본에는 자음과 모음의 제작 원리, 발음 방식, 음운 체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문자에 담긴 과학성과 철학적 배경까지 설명된다.

그러나 해례본은 한동안 사라져 있다가 2008년 경북 안동의 한 고택에서 발견되었고, 그 발견까지의 역사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해례본을 찾아서』는 바로 이 빈틈과 단절을 문학적으로 복원한 작품이다.


줄거리 요약 – 잃어버린 책의 흔적

주인공 ‘주연’은 대학에서 고문헌을 연구하던 석사생이었다가, 돌연 학업을 접고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중, 한 통의 낡은 편지를 받고 다시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편지의 발신인은 오래전 실종된 그녀의 지도교수였으며, 편지에는 “그 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언어의 심장입니다.”라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이후 주연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해례본의 사라진 원본’**이 남긴 단서를 찾기 시작한다. 고문헌 수집가, 서지학자, 그리고 국정 자료실에서 은밀히 활동하던 옛 동료들과의 조우 속에서, 그녀는 점점 더 **‘언어의 권력’**이 어떤 식으로 정치화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 소설은 단순한 유물 추적기를 넘어서, 역사와 권력, 언어와 정체성의 얽힘을 매우 정교하게 서술한다.


기록이 사라질 때,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해례본을 찾아서』의 핵심은 단지 사라진 고서를 찾는 데 있지 않다. 작가는 해례본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통해, 우리가 ‘기록’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잃었을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함께 잃는지를 보여준다.

책 속의 ‘주연’은 단지 문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잊어버린 신념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되찾아가는 인물이다. 해례본이 그녀에게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신념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 언어는 누가 소유할 수 있는가?
  • 문자는 기술인가, 정신인가?
  • 기록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 기술이 범람하는 지금, 진짜 기록은 더 쉽게 지워지며, 진실은 더 빨리 왜곡된다. 『해례본을 찾아서』는 이러한 현실을 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은유적으로 반추한다.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쓴 역사

이 책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지점은 여성 서사의 힘이다. 주인공 주연은 기존의 역사 탐사물에서 흔히 보이던 남성 지식인이 아니다. 그녀는 상처를 입었고, 실패를 겪었으며, 외면했던 과거를 다시 끌어안는다. 그러나 그 여정은 약함이 아니라, 자기 회복과 역사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여성 서사는 단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적인 해석자로서의 인간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 대한 문학적 실험이다. 주수자는 이 작품에서 여성의 목소리로 역사의 결을 섬세하게 읽어내며, 해례본이라는 대상을 통해 우리 모두의 정체성과 책임을 묻는다.


언어는 살아 있는 정신이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책은 단지 문자와 소리의 배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에 대한 선언이다.”

이 문장은 『해례본을 찾아서』가 단지 고서를 찾는 스릴러가 아님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 소설은 문자 이전에 ‘정신’을 이야기한다. 한글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며, 해례본은 그 철학의 원천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묻는다.
“당신은 스스로의 언어를 진정 이해하고 있는가?”


마치며 – 과거를 통해 미래를 읽다

『해례본을 찾아서』는 문헌의 이야기이자, 정체성의 이야기다.
언어는 문명이지만, 그 문명을 기록한 문자는 곧 기억의 도서관이다.
해례본을 찾는 여정은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주수자의 이 작품은 그렇게 고요하지만 묵직한 방식으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되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독자 스스로의 언어로 다시 대답되기를 기다린다.